※각 분야의 자료 수집

1.교회개혁

2.예배갱신

3.행정개혁

1) 예장 통합측 총회, 기독교용어연구위원회 연구자료

(1)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주님. 하나님 아버지
4. 우리 성도님들이→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5. 대표 기도→기도 인도
6. 사랑의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
7. 참 좋으신 하나님→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2)
예배. 예식 분야

8.사회자 ---인도자(예배시)
성가대 ---찬양대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사용불가(설교시)
11. 대예배--주일 예배
12. 열린 예배--열린 집회
13. 예배봐준다--사용불가
14. 준비찬송--사용불가
15. 예배/예식/기도회--구별사용
16. 헌금--봉헌
17. 축제--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18.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3)
장례 분야

19. 소천(召天)하셨다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1. 미망인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22. 칠성판(七星板)--고정판 또는 시정판
23. 영결식, 고별식 --장례예식
24. 삼우제(三虞祭)--첫 성묘(省墓)

(4)
회의 용어

25. 고퇴--고퇴 또는 의사봉
26. 자벽-->지명, 임명
27. 증경--전(前)
28. 휘장 분배-->꽃 증정
29. 당회장 -> 담임목사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32. 사모 →사모님

4.인사조직

1) 셀조직으로 교회

(1). 왜 셀로 모여야 하는가 ? (Why Cell?)

1. 셀을 통해 복음전도 - 교회 성장이 이루어진다.

1)  셀 복음전도 전략

(1)복음전도의 종류

① 매스미디어 전도

② 행사전도

③ 문서전도

④ 노방전도

⑤ 생활전도

⑥ 관계전도

⑦ 총력전도

⑧ 기타

(2) 관계전도의 방법

① 관계를 바르게 형성해야 한다.

② 다리를 놓아야 한다.

③ 접촉점을 활용해야 한다.

④ 사람들의 이름을 동심원상에서 목록으로 정리하여 놓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3) 복음의 내용

① 하나님의 목적(창1:27, 행17:26-27, 롬1:18)

② 인간의 필요(골1:16, 사53:6, 사59:2, 롬6:23)

③ 그리스도의 대책(골1:19-20, 롬5:8, 벧전3:18, 요10:10)

④ 원죄(롬5:12)

⑤ 심판(히9:27)

⑥ 그리스도의 대속(요일1:7)

⑦ 그리스도를 영접함(요5:24)
※로마서를 활용한 전도 롬3:23 인간의 죄 - 롬6:23 죄의 결과 -
롬5:8 하나님의 대책(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 롬 10:9~10 구원의 방법 -
롬8:39 하나님의 사랑 확신

(4) 셀은 복음을 최효율적으로 전하는 그물망이다.

(1) 셀 멤버들은 각자 자기 생활영역 안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전도한다.

(예) 친교모임 - 식사, 체육대회, 수련회

(2) 사람들의 '실질적인 필요을 채워주는' 전도를 행한다.(사랑 전도법)

(3) 지역활동을 통해 전도를 행한다.

(예) 지역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실제로 도와 줌.(생활 빈핍자, 양로원, 고아원)

(5) 셀을 통해 새신자가 정착하여 안정적인 신자가 된다.

1)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짐.

(1) 셀의 전도기능을 통해 불신자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2) 셀을 통해 성령의 은사나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므로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된다
(영적 은사가 셀의 자연스런 활동 속에서 풀려 나온다).

2) 교제(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을 체험함.

※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창조하였다.

※ 사도행전 2장 42~47절

영적 교제(spiritual fellowship) :

예배 친교(social fellowship) :

성도의 교제-대접하고 대접받음. 나눔(material fellowship) 과 돌봄(care) :
물질을 나눔, 육체와 마음, 영혼의 치유, 격려, 용기

3. 셀을 통해 영적 성장(성숙) 및 제자화가 이루어진다.

1) 셀 공동체 안에서 멤버들은 서로 영적 성장을 격려 받는다.

셀을 통해 멤버들은 삶의 전 영역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동시에 복음 증거의
유능한 일군이 된다.

2) 셀을 통한 리더십 훈련은 제자화의 핵심요건이다.

셀을 통헤 이루어지는 제자화 과정의 예

※ 새신자 정보가 셀 리더에게 접수됨.→

셀 리더는 새신자를 셀 그룹에 정착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 주간 내에 심방해야 함.→
새신자는 셀 그룹 안에서 신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함.→
훈련된 교사들에 의해 기초교리에 관한 교육을 받음 평신도 훈련을 받음(구원의 확신과 내적
치유 및 해방을 체험). → 후속 교육을 받기 시작함(평신도 조직신학, 헌신 및 생활에 대해).→
셀 그룹 인도에 대해 배우고 훈련받음. →셀 리더로서 셀을 인도함.

요약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구원이다.

셀은 비신자가 구원의 영역으로 참여하는 접촉점(다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몸된 교회의 지체로 굳건히 세워지고 결국 복음을 증거하는 제자가 되도록 만드는 산실이다.
(전도, 정착, 세워줌).

이 같이 교회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와 사명을 수행하는 점에서 셀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될 것이다.

5. 사회봉사

1) 목회적 서비스 노인에 우선돼야

(1) 교회가 감당해야할 노인복지-노인복지는 대사회선교에 대한 교회의 책임

고령화사회는 고령자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

-노인요양원이나 실버타운 건립등으로 발전돼야


※성경자료 수집

성경의유래

성경의 올바른 분류법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

족장들

광야의 방랑생활

가나안 정복

통일 왕국

분열 왕국시대와 포로생활

시문학서와 선지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 생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부활

죄와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 죄 사함의 길

옛 언약과 새 언약

교회의 설립

사도행전에 나타난 개종자

구원을 얻는 믿음

성경적인 세례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

기독교의 권위

교회의 명칭과 통일성

교회의 예배와 재정

교회의 조직과 임무

성령

그리스도의 재림

영원한 형벌과 보상

성 막

널 판

유 월 절

건 축

바 울 서 신

ROMANS

성경과 영감

어떻게 복음서를 읽을 것인가?

  ※장성우교수의 논문

한국 기독교의 성만찬 회복에 대한 연구 [한성연구논문집]

2. 성만찬 떡 재료에 관한 고찰 [한성연구논문집]

3. 그리스도의 교회 자유주의 형성에 관한 분석 연구 [한성연구논문집]

4.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앙고백에 대한 고찰 [한성연구논문집]

5. 그리스도의 교회 회중성 회복을 위한 제언 [한성연구논문집]

6. 그리스도의 교회와 환원신학 [한성연구논문집]

7. 구약에 나타난 원형회복사상에 대한 소고

-여호수아 22장 28절을 중심으로- [한성연구논문집]

8. 신학교육의 적정인원규모연구 [동아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9. 체제이론의 관점에 의한 한국교회의 분석.[대전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8]

10. AN ANALYSIS OF CHURCH GROWTH IN KOREA WITH A VIEW TO STRUCTURE.
[FAITH THEOLOGICAL SEMINARY GRADUTE, D.MIN, 1984]

11. 건전한 공동체 발전을 위한 인간행정의 중요성. [미래운동본부에서 발표한 논문]

12. 1992년 이후의 한국교회 권위적 구조의 문제점 분석비판

-체제이론의 FEEDBACK으로-[실천신학회지1호]


※존 녹스…英종교개혁 이끈 ‘변혁의 전도사’

맨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 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사람, 그가 존 녹스이다.
그가 땅에 눕혀질 때,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여기에
누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1514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
1540년에 그는 사제직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고위 당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불러내어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셨다. 그가 언제 개혁 신앙으로 회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와 관계를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위셔트는 곳곳에서 개혁 신앙을 외쳤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그는 1546년 3월에 비튼 추기경에 의해 화형을 당하게 된다.
녹스는 위셔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세인트 앤드류성에 머무르게 되는데,이 곳에서의 3개월이
그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다.
마치 칼뱅이 제네바에서 파렐에 의하여 하나님의 손에 길들여진 것처럼, 녹스 자신은 조용한
학문 연구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스코틀랜드를 위한 영적 전쟁터로 내보내셨다.
녹스는 그 이후 자신을 복음을 위해 설교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1547년 6월 프랑스 지원병의 도움으로 총독의 군대가 세인트 앤드류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녹스는 갤리선의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게 하신 것처럼,그를 갤리선에서 건지셨다.
노예에서 해방된 녹스는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영국에서 설교하면서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과 예식 법규 제정에 공헌했고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국교회 안에 남아있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상황도 가톨릭 신앙을 가진 메리 여왕이 등장한 후 바뀌었다.
녹스는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에 머무르면서 칼뱅 불링거 베자 등과 교제하였다.
이 때 녹스는 신앙을 위협하는 군주에 맞서 대항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칼뱅의 요청에 따라 영국 피란민 교회의 목사가 되어,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까지
담당하였다.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녹스는 신자들의 예배를 돕는 문서를 만들어주었고(Letter of Wholesome
Counsel),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 하여금 ‘회중의 수호자들’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들은 당시 섭정 여왕인 프랑스 태생의 기즈의 메리에 맞서서 투쟁하였고 녹스는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 때 스코틀랜드의 국제 정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프랑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를 몰아내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나라를 세울 꿈을 꾸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후원자인 프랑스가 승리한다면 나라의 독립과 함께 개혁
신앙도 날아갈 판이었다.이것은 영국에게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녹스는 이런 사실을 영국 왕실에 설득하여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를 돕기 위하여
출병하게 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개혁
신앙에 입각한 국가 건설을 할 수 있었다.

녹스는 이와 함께 신앙 증진을 위하여 힘썼는데 온건한 칼뱅주의에 입각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제정했고 예배 의식을 위해 소위 ‘낙스 전례서’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었다.
교회의 치리와 교구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교육방안을 담은 이 문서들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의회에 의해 거부되어 교회는 경제적으로 귀족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가난해졌으나 귀족들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독립성을
키워나가게 되었고 이것은 교회의 독립을 보장하는 방편이 되었다.

1561년 프랑스로 시집갔던 메리 여왕이 돌아온 후 개혁파는 어려운 시절을 맞기도 했으나
녹스는 의연히 대처하였다.
1567년 메리 여왕이 실정을 거듭한 끝에 몰락하였고 녹스의 친구인 모레이의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uart)가 섭정이 되어 개혁교회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녹스는 60세가 되던 1572년 11월24일 정오에 아내가 읽어주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들으며
부활의 소망 중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후,오후에는 “내가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을 읽어주시오”
라고 부탁하여 요한복음 17장을 들으면서 잠들었다.이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잠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뿌리내린 녹스의 신앙은 약 300여년 후,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의 가슴속에
살아있었다. 그들은 황해도 송천 출신의 서상륜 등에게 그 신앙을 전하였고 그 결과 송천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다.진리에 대한 확신 하나로 민족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던진 녹스의 신앙과 삶을 오늘 우리 상황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야 할 것이다.

김운성(부산 영도중앙교회 담임목사)

◇필자 약력

△연세대학교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대학원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박사과정
△현 부산장신대학교 겸임교수 △현 영도중앙교회 담임목사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 판넨베르그의 생애

1960년대 몰트만과 함께 희망의 신학의 제창자로 인정 되었던 독일의 조직 신학자이다.
희망의 신학자라는 칭호를 본인은 달가워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학의 중심에 미래 또는
종말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는 1928년 독일의 쉬테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신학적 경향의 기본 방향은 그의 생애 초기에 형성되었다.
그의 신앙 경로가 신학 형성의 과정을 이끌고 일생의 신학연구의 목표가 되었다.
판넨베르그는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1945년 공립도서관에서 우연히 무신론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이체의 책 한권을 보게 되었다.
니체의 책들은 판넨베르그로 하여금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세계가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책은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시기에 한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겨울 오후 저녁나절 멀리서 비추는 빛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가 그 지점에 이끌리자 그는 빛의 바다속에 빠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경험 속에서 그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요구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그 뒤 여러해 동안 이 경험이 판넨베르그에게는 강한 소명의식의
근거가 되었다.
기독교 자체에 대한 체험은 고등학교 문학선생님을 통해서였다. 판넨베르그는 이 선생님을
통해서 초기 니체의 책을 읽으며 인간의 삶을 왜곡시킨 책임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과 상반된
것을 발견하고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연구를 통하여 기독교가 최고의 철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결론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2. 판넨베르그의 신학 형성 과정

칼 바르트의 저작을 통해서 모든 실제에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되고 1950년
직접 바젤로 가서 바르트에게 친히 배우게 된다.
그는 선생님의 사상속에서 발견되는 자연적인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적 계시 사이의
이원론에 대하여 불편해 하였다.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의 계시적 역사는 이 세계와 현격히
상반된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판넨베르그는 구속과 창조 사이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발견한 연속성을 주장함으로서 모든
종류의 세속적 경험 안에서도 신앙적 암시를 주는 것들을 추출해 내고자 시도하게 된다.
1951년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서 피터부루너(Peter Brunner), 에드문트 슈링크(Edmund
Schlink), 한스 폰 캄펜하우젠(hans von Campenhausen), 게르하르트 폰라드 밑에서
공부하면서 계시의 본질에 대한 그의 사상이 형성 되었다.
1961년 출판된 역사로서의 계시를 통해 그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판넨베르그는 이 책을 출판하기에 전에 구약학의 롤프 렌토르프, 클라우스 코호,
조직신학자 울리히 빌켄스, 트루츠 렌토르프, 교회사가 마르틴 엘체, 실천신학자 디트리히
뢰슬러 등과 스터디 그룹이 되어 연구하였다. 이 연구의 결정체가 역사로서의 계시였다.
20세기 전반부를 휩쓸었던 변증법적 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의 결정적인 약점인 역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결핍을 발견하고 역사를 신학의 새로운 주제로 전면에 내세운 신학자들이다.
판넨베르그는 신학에 있어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칼 바르트의 초월주의 와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적 케리그마 신학의 약점인 역사의 결핍을 발견하고 역사를 신학의 주제롤
내세우고 발전시켜 나갔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는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초월주의이다. 즉 초 역사적이다.
불트만은 실존적 결단의 신학이다. 불트만은 기독교적 선포에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폰라드의 구약 역사는 모든 신학이해에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역사의 폭을 너무 좁혔다고
비판하고, 쿨만의 구원사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의 역사,
교회의 역사 속에서만 발견 할 수 있다고 주장 했다.
이에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 세계 역사 속에서 발견 될 수 있다고 선언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 판넨베르그의 보편사 신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하나님의 통치흔적을 남기셨다. 그러므로 세계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역사이다.

3. 판넨베르그의 보편사신학

l. 역사란 무엇인가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계시의 열쇠, 계시의 통로, 계시자체로 보고 있다.
모든 역사 현상에 하나님의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 성령을 통해 세워진 지상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자의 부활에
하나님의 계시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 판넨베르그는 성경의 역사를 포함한 일반 역사 속에서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락 사건을 간과 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획이다.
계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판넨베르그는 계시의 인식에 요청되는 신앙보다 지식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지식보다 신앙을 요구한다.

4. 판넨베르그의 역사 이해의 배경

그의 신학적 배경이 된 신학자는 칼 바르트, 불트만, 폰라드이다.
칼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속에 담겨 있고, 교회의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가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의 설교를 들을 때 가능하다.
이것이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특징이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고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를 버렸다.
폰라드의 구원사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 교회의 역사에서 발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위의 신학 사상에 반기를 들면서 하나님의 계시는 일반 역사 속에서 발견 될 수
있다고 선언 하였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제한해서는 않된다고 주장하였다.

5. 판넨베르그의 역사계시의 2대 특징

l. 우주성

역사는 여러 사건으로 연결된 조직이다. 어떤 역사이든 본질상 우월적인 것은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나 강도의 형은 같은 역사적 사건이다. 자연 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자연에 나타난 계시, 예수와 유관된 역사에 나타난 계시, 복음의 계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명백히 보여주는 특별하고 독특하고 신적인 계시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다.

l. 총체성

역사적 계시가 우주적인 만큼 계시는 단 하나의 단일한 사건에서 이해 될 것이 아니라 역사의
총체적 관점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永單番的 계시는 없다고
판넨베르그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가 발전 됨에 따라 계속된다. 역사적 계시는 단지 역사의 끝에 가서
판정 된다. 그래서 계시는 현재에서 절대성이 없고 미래에 가서 절대성 완전성이 있다.

6. 역사와 예수 및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

예수나 이스라엘 연구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직적 계시(vertical revelation)에서 시작하지
않고 역사의 수평적 평면(horizontal plane)에서 시작한다. 기독론은 역사적 탐구의 결과이지
신학적 탐구의 결과는 아니다. 즉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이다. 역사 안목을 지닌 사람은 역사 속에 고유된 계시를 볼 수 있다.
굳이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초자연적 개입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특별계시의 수령자가 아니라, 특별한 역사의식의 소유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참여하셨다는 생각이고, 역사의 실제는 역사의 끝에 가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통일된 전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역사를 읽는데 우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민족이지 하나님이 특별히 절대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판넨베르그는 예수는 최종계시가 아니고 예수는 역사에 나타난 보편적 계시로 이해 한다.
예수는 선재적 존재의 출현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적 지평선(history’s future horizon)
존재의 시간적 존재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을 나눔과 같이 역사의 끝에 가서
하나님의 총체적 자기 계시를 나눈다.

7. 예수 부활의 역사적 의미는 ?

예수 이해의 중심은 그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이 중요한 것은 그의 부활이 역사의 끝
(end of history)을 역사자체 안에서 실재화 했기 때문이다. 이는 몰트만과 비슷하다.
몰트만은 부활은 역사 속에서의 종말적 사건 傳統的成肉은 先在的 神의 地上 出現이지만
판넨베르그의 성육신은 미래의 하나님이 역사속에 나타나신 것이다. 미래의 하나님이
부활이란 사건으로 역사의 현장에 오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종말의 선취이므로 이 사건은 전 세계 역사를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판넨베르그는 예수 부활사건에 직접적으로 내재하는 의미를 네가지로 조명한다.

첫째, 예수가 부활했으면 세계의 종말이 도래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한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것을 일반적 사자들의 부활, 즉 종말 사건들의 시작으로 이해 했다.

둘째, 예수 부활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부활절 이전의 사역을 확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死者들 가운데서 부활을 통해서 예수는 인자와 나란히 서게 된다. 그래서 인자는 다시
오시는 예수라는 통찰이 서게 된다.

넷째, 예수가 죽은 자들중 부활하여 신으로 고양되어 세계의 종말이 도래 했다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계시된다. 역사의 종말이 예수 안에서 선취되었고, 하나님 자신이
예수 안에서 계시된다. 판넨베르그의 기독론은 성육신이다.
부활하신 예수와 無關하면 미래의 종말에 소망이 없다.

8. 역사가 계시를 전달하는 방법은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일지라도 역사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계시는 아니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예수를 통해서도 계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개개의 역사적 사건은 내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구약 율법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신약의 복음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형성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구약은 다른 어떤 책보다 우월하다.
이런면을 보면 칼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으로 나간다.
역사에서 이해되는 것은 사건이지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어느 한 사건에서도
알려지지 않는다.
역사의 한 사건에서는 계시의 파편(fragmentary)일 뿐 전체(the whole)가 될 때 다 알게 되고
그것은 오직 역사의 마지막 날(at the end)에 가서 알게 된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계시하시고 모든
역사의 의미는 그 날에 완전히 해명된다. 이 같은 관점에서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마지막이
오기 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는 가설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100퍼센트 이루어 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성적 판단 위에 신앙적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정통적 기독교 신학이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관점으로 재 해석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9. 평가

l 비판적평가

1). 역사를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으로 생각하는 판넨베르그 신학의 특징은
“역사로서의 계시(Revelation as History)이해”를 신학의 전재로 상정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철학적 견해를 상정하고 있다. 전체적 안목에서 역사를 역사를 보고 있다.
계시의 역사성을 논구하는 판넨베르그는 이 계시의 인식에 요청되는 신앙보다 앞서서
역사철학적 접근을 앞세우므로 인본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의 모든 비밀과 의미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재조정 된다고 본다.
그러나 해석된 말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2). 역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 歷史 至上主義가 되었다. 역사를 주장하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객관화 되어 버렸다. 따라서 역사를 주관하지 못하는 신이 된다. 모든 역사 속에
하나님이 대상화 될 위험이 있다.

3). 성경 계시의 가치를 평가 절하 한다. 믿음이 역사적 지식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신앙은 역사적
지식이 제공해준 기초 위에서 그 역사적 사건으로 계시된 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편사의 영역으로 확대함으로서 신학의 과제를 많은 인문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의 역사성과 인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차원으로 개방하여
놓았다. 이 결과 성경계시의 절대성이 보편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고, 믿음의 결단보다
역사탐구가 앞서게 되어서 성경의 절대계시와 절대적 확실성이 상실된다.

긍정적 평가

1). 역사를 중시한다. 성경의 계시는 역사 속에서 진행중이다. 판넨베르그의 역사신학은
“하나님과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성적 판단 위에서 신앙적 결단을 하도록 돕는다.

2). 종말론적 강조점은 희망적이다. 판넨베르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의
선취(Vorwegnahame Prolepse)라고 칭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는 역사의 모든
신비가 들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종말론적
내용을 다 이해 하고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궁극적인 것이긴 하지만 완전한 의미를 다 파악 할 수 없고 세상의
끝 날에 분명해 질 것이라고 판넨베르그는 해명했다.

3). 판넨베르그의 역사 신학은 보다 정직한 신앙 생활에 유익을 준다.
역사적 확신은 신앙적 확신이 아니다. 역사적 탐구는 절대적 확실성을 초래 하지는 못한다.
신앙은 절대적 확신이다. 역사와 신앙은 유관적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해석을 곁들인
역사적 탐구는 확실성의 수준이 아니라 가능성의 수준이다.
그러나 역사신학적 경향은 이성적 결단을 요구 함으로 무조건적인 믿음에서 역사 해석과
일치되는 신앙을 정립하게 한다. 신앙은 언제나 역사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l. 정리

20세기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관계에서 전개 되었다.
판넨베르그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과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 신학을 아우르며 보편사 신학을 주창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내재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어느 한편에서만
하나님의 계시를 볼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려고 노력했던
신학자이다.
판넨베르그는 하나님은 역사의 주님이기 때문에 역사를 제한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이 세계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와 통치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세계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의 선취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역사의 모든 신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신비를 지금은 숨겨져 있어서 다 이해 할 수 없지만 세상의 끝 날에
명확하게 될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우리에게 기독교의 신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 신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판넨베르그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보고 있다. 인간에 의해 미래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미래가 창조된다.
판넨베르그는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란 글에서 ‘오직 자신의 미래에 확실한 사람만이
태연하게 오늘을 대 할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이 인간의 일에 속하는 것과 같이 죽음을 넘어서 바라는 것도 인간의
일에 속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을 생각하지 않고는 자신을 이해 할수 없는데
‘죽음을 넘어서는 생의 표상은 부활로서 표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부활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미래로 생각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 인간이 부활의 희망을 갖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예수의 부활이다.